히포크라테스를 잇는 그리스의 해부학자이자 의사, 저술가인 2세기 고대의 마지막 탁월한 의사 갈렌(Galenos, 129~199)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기리는 유명한 성지 ‘아스클레피에이온(Asklepieion)'에 살고 있었다. 그런 그조차도 “여자의 생식기는 남자의 것보다 불완전하므로 남자가 여자보다 완벽한 존재”라고 썼다. 갈렌은 자궁을 ‘뒤집힌 음낭’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에 쓰인 아비세나의 『의학 정전』에는 “여자의 생식 기관은 자궁이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 기관, 페니스와 그 부속 기관을 모방하여 창조되었다.”고 씌어 있다.
갈렌과 거의 2천년 동안 그를 추종해온 사람들은 모두 여성의 몸이 서둘러 벗은 양말과 같다고, 즉 남성의 몸을 안팎으로 뒤집은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질은 뒤집힌 음경이었고, 음순은 음경의 포피였고, 자궁은 안으로 들어간 음낭이었고, 난소는 여성의 정소였다. 성인의 생식기는 상동 기관이라는 것은 맞지만, 엄밀히 말하면 음경의 여성 기관은 질이 아니라 클리토리스이며, 음순은 음경의 포피가 아니라 음낭에 해당하는 구조이다.
갈렌은 ‘자궁은 태아 적에 만들어졌는데, 열이 부족해서 밖으로 돌출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 근거로 여자가 남자처럼 정액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성생활을 하지 않으면, 여자의 ‘씨’가 체내에 고여 히스테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결혼 생활은 자궁의 성적 활동을 보장해 준다. 따라서 결혼 생활을 통해 자궁의 성적 활동이 보장되지 못한 여성에게는 월경혈과 정액의 부패로 ‘자궁성 질식(경련)’이 오게 된다. 훗날에 이 말은 '어머니 질식(Suffocation of the mother)'는 말로 변용되어 수세기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초기 유대-기독교 사상가들은 돌아다니는 자궁으로 인한 여자들의 자궁성 질병 치료를 반대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한 많은 중세 교부들은 부부 관계에서조차 임신을 목적이 아닌 쾌락을 위한 성관계를 부정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런 성에 대한 부정적 사고의 근원을 그가 회심 이전에 몸담고 있던 마니교의 교리와 그의 젊은 날의 문란했던 성생활에 대한 반동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기독교 성장과 함께 사산한 아기의 영혼을 판다고 믿었던 산파들의 활동도 위축되고 초기 의학은 기독교와 대립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음란하고 쉽게 유혹에 빠지므로 마녀가 여자라는 생각도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더욱 굳어졌다. 한편 여자의 본성은 심신이 나약함으로 규정되었고 이는 중요한 논제가 되었다.
전반적으로 자궁에 대한 중세의 인식은 해부학적 측면보다는 신학적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궁은 예닐곱 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해부가 금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시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적었다. 그나마 처형당한 죄수나 병사한 사람의 시체가 주를 이루었다. 그 시대에 수도원은 오늘날의 병원의 역할을 대신하였고, 수녀들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지만, 권위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최종적 권위는 남자 성직자에게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자궁에 집시와 같이 방랑벽이 있다고 생각했다. 몸속을 돌아다니는 자궁(Hystera)이 수많은 여성의 도덕적, 정신적, 육체적 이상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은 르네상스까지 이어졌고, 19세기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자궁이 충분한 혈액 공급을 위해 뇌와 직접 경쟁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양다리는 불가하고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다. 쩐과의 전쟁이 아니라 자궁과의 전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사람들은 여전히 월경혈이 여자의 몸을 더럽힐 뿐 아니라 몸속에 남아 있으면 부패해 독기를 내뿜고 질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자의 몸은 남자의 몸을 뒤집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성 해부학을 바탕으로 자궁 각 부분의 명칭을 지었다. 여자에게도 고환이 있어서 여자의 씨 혹은 정액이 이러한 상사기관(相似器官)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겼다.
르네상스 초기, 자궁에는 일곱 개의 방이 있다고 믿었다. 그 중 각각 방 세 개는 남자와 여자가 쓰고, 나머지 한 방에서는 남녀 양성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가 끝날 무렵, 자궁은 단 하나의 방에 두 개의 관이 달려 있는, 전체적으로 페니스와 비슷하게 생긴 기관으로 인식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베살리우스는 수태 이후 월경혈이 유방으로 가서 젖의 분비를 돕는다고 믿었다.
해부학에 발달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여성의 자궁은 여전히 뒤집어 놓은 자궁이었고, 여성의 몸은 결함과 허점투성이라고 보았다. 분만에서의 지배권은 점차 산파에서 남자 의사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바로시 시대, 여자의 차고 습한 기질의 특성상, 월경혈은 몸에 열이 부족해 남아도는 체액이 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여자의 몸은 양분을 섭취해 피를 만들어내지만 피를 충분히 덥히지 못해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월경은 일종의 기능 장애였고, 여자의 몸에 결함이 있다는 증거였다. 도 자궁이 여자를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고 했다.
빅토리아 시대 무월경의 표준 치료법은 자궁 경부에 거머리 몇 마리를 놓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거머리가 자궁 속으로 기어들어가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에 못지 않게 방혈은 몸에서 독성 노폐물을 제거하는 치료법으로 여전히 유효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자궁의 힘은 두뇌의 힘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셀레는 19세기를 ‘자궁의 시대’로 일컬었지만, 여자들에 대한 통제라는 측면에서 모든 세기가 다 자궁의 시대였다. 돌아다니는 자궁과 짓눌리는 장기에서부터 히스테리, 무도광(舞蹈狂), 우울증, 상사병, 산욕열 등은 여자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리처드 워츠와 바바라 워츠에 따르면 19세기에는 ‘생식 기관의 건강 정도가 여성의 가치를 재는 척도’였고, ‘부인병’은 여성의 모든 건강 문제를 설명하는 포괄적 용어였다. 1869년 의사 디릭스는 자궁의 위치가 바뀌면 두통, 인후통, 척추 만곡, 하반신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자들은 병에 잘 걸리므로 남자와 동등한 직업을 갖고 경쟁하는 것은 부당하게 여겨졌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일수록 여자들에게는 배타적이었다. 여자들, 특히 중상층 여자들에게는 교육과 경제적 독립에 이르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결혼은 여자의 바람직한 미래로 적극 권장되었다.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몸이 ‘정상이 아닐 때’ 성관계를 거부할 수 있었다. 공장주는 여자들의 ‘고질병’과 ‘비정상적인 생리 현상’을 빌미로 남자들과 똑같은 일을 해도 보수를 적게 주었다.
그 당시 피임과 낙태는 금지되었다. 엄마가 되는 것을 여자의 가장 큰 성취로 보았기에 잉태치 못하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남녀가 동시에 오르가슴을 느껴야 임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자는 남자보다 성욕이 약하다는 이유로 여자의 오르가슴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자가 남편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거나 남편에게 반항할 때, 의사는 여자에게 정신병이나 신경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여자가 성적 쾌감을 경험하거나 적극적인 성욕을 보이면 남자밝힘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처럼 정신의학은 여자들을 지배하고 처벌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여성 정신병의 신체적 원인은 혼란과 히스테리라는 이차적 증상을 일으키는 난소와 자궁의 결함이었다. 월경, 출산, 수유는 여자들의 이차적 정신병의 일차적 원인으로 확인되었다.
20세기에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등의 호르몬이 발견됨에 따라 월경은 더 이상 신비롭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호르몬의 분비 변화에 따른 복잡한 주기적 현상일 뿐이었다. 월경은 자궁 내막의 기능성 조직이 일정 기간 동안 증식된 다음 떨어져나갈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자궁 속에 나쁜 피나 독성 물질 따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서구 사회는 월경을 하는 여자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격리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월경을 하는 여자들의 행동에 대한 금기는 여전했다. 월경은 질병과 같은 것이었고, 품위 없는 것이었다. 피임, 낙태, 제왕절개술, 호르몬 대체 요법, 폐경기의 자궁적출술, 월경전증후군의 의료 문제화에 대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자궁에 대한 과도하고 강박적인 관심이 20세기의 특징이었다. 자궁이 없는 남자들은 여전히 타인의 자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2차 세계대전 후 상황은 약간 호전되었다. 미국에서는 ‘가족계획’이가 일반화 되었고, 많은 주에서 페서리, 콘돔, 다양한 살정자제 판매를 합법화했다. 이 무렵 경구용 피임약과 자궁 내 피임 장치인 루프가 개발되었다. 법률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1973년 1월 22일 미 대법원은 ‘제인 로’의 낙태를 합법화 하였다.
라나 톰슨, 백영미 역, 『자궁의 역사; The Wondering Womb』, 아침이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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